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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기사

미국입양고아..천재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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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기자의 느낌]

양아버지에게 맞아 숨진 '현수' 조각상 만들다… 입양아 출신 미국 사업가 토머스 클레멘트

6·25 직후 전쟁 고아
너덧 살쯤 버림받고 길에서 얻어맞고 지내
운 좋게 보육원 갔지만 혼혈이라고 또 차별

내 또다른 얼굴 '현수'
입양 4개월만에 숨져… 내 이야기처럼 온몸 아파
학대 없는 세상 꿈꾸며 한국 땅에 동상 설치

매일 구걸하던 거리의 아이, 이젠 특허 52개 낸 과학자로

밤마다 전쟁 터지는 꿈
자면서도 "불이야!" 침대에선 매일 떨어져
생일선물 처음 받았을땐 누가 훔쳐갈까 지키기도

입양아들의 연결 고리
애타게 서로 찾고 있는 입양아와 친부모 위해
사비 100만달러 들여 DNA 검사 키트 만들어

다시 한국을 배운다
어머니가 두고 간 길에서 더 넓고 큰 세계 만나…
한국계 아내와 결혼 후 한국은 내게 영원한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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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오른손 끝에는 팔랑거리는 나비가 앉았다. 지난 3일 서울 내곡동 다니엘학교 교정에 세워진 ‘현수와 나비’ 조각이다. 이 조각을 9개월 동안 아내 김원숙과 완성한 토머스 클레멘트가 소년의 나머지 왼손을 가만히 쥐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가렴, 이곳에서의 슬픔은 다 잊고….” 이 말이 문득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골목에 서 있던 어린 시절 그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현수’는 지난 2013년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입양되고 나서 4개월 만에 양아버지에게 맞아 숨진 아이다. / 이태경 기자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나비를 날리는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어?"

작년 7월 미국 의료기기회사 멕트라 랩스(Mectra Labs) 대표 토머스 클레멘트(65)가 유명 화가이자 조각가인 한국인 아내 김원숙(64)에게 불쑥 물었다. 김씨는 잠시 의아했다. 남편은 과학자다. 뜬금없이 왜 조각을 하겠다는 걸까. 김원숙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어린 시절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고 싶어졌구나.'

한국계인 클레멘트는 1956년 한국에서 입양됐다. 친어머니는 그를 어떤 골목에 세워둔 뒤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했다.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르는 그가 너덧 살 무렵 어느 날로 기억하는 일이다.

클레멘트는 서툴게나마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손끝으로 나비를 날려 보내는 남자아이 조각을 만들었다. 아내 김원숙은 그런 클레멘트를 옆에서 도왔다. 몇 달 뒤 조각이 완성될 무렵 클레멘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사실 몇 년 전 메릴랜드에서 양아버지에게 얻어맞아 숨진 현수라는 아이야." 김원숙은 잠시 숨을 멈췄다.

가정폭력으로 숨진 현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2010년 한국에서 태어나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졌다가 2013년 10월 미국에 입양됐다. 이듬해 2월 양아버지 브라이언 오캘러핸의 폭행으로 미국에 간 지 4개월 만에 숨졌다. 오캘러핸은 1급 아동학대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클레멘트는 "현수 이야기를 뉴스로 전해 들었을 때 내가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고 했다.

부부는 조각틀에 청동을 부어 현수 조각 2개를 만들었고, 그중 하나를 클레멘트 장인 김경래씨 도움으로 지난 3일 서울 내곡동 장애인학교인 '다니엘학교' 정원에 세웠다. 나머지 하나는 메릴랜드주에 있는 또 다른 장애인학교 린우드 교정에 설치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더 이상 입양아 학대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토머스 클레멘트와 김원숙을 지난 4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클레멘트에게 물었다. "왜 그토록 죽은 현수에게 감정이입을 했습니까. 당신도 입양되긴 했지만 현수처럼 학대당하며 자란 건 아닐 텐데요." 클레멘트는 셔츠 소맷자락을 걷어서 보여주며 말했다. "이걸 보시죠." 그 팔뚝엔 불에 덴 큰 흉터가 있었다.

날 불태워 죽이려던 거리의 아이들

1956년 입양될 당시 토머스 클레멘트의 여권 사진. 사진 속 아이는 울고 있었다.
―이게 뭐죠?

"어머니를 잃고 구걸하며 지낼 때 아이들이 달려들어 내 몸에 불을 질러 생긴 흉터죠. 보다시피 나는 튀기, 혼혈아였거든요. 내 친아버지는 아마도 미군 병사였겠죠. 당시 한국 사람들은 튀기를 경멸했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아이들이 나를 보고 '튀기다! 악마야! 튀기는 불에 태워 죽여야 해!'라고 외치던 장면요. 어떤 아이가 팔에 휘발유를 부었고 다른 아이가 거기에 불을 붙였어요.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접었는데 그 바람에 오히려 온 팔에 불이 붙었죠. 마침 지나가던 어른 하나가 황급히 옷을 덮어 불을 꺼준 덕에 겨우 살았죠."

6·25전쟁 직후였다. 너덧 살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클레멘트는 추측했다. 기억은 놀랍도록 선명해서 눈 감으면 당시 곳곳에서 울려 퍼졌던 총탄 터지는 소리, 포탄이 터지면서 피어올랐던 먹구름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아이는 전쟁을 그렇게 온몸으로 겪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투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다음 어디론가 한참 데려가더니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를 세운 다음 와락 입을 맞추었다. "이제부터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한참을 걸었다.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어머니는 없었다. 울 겨를도 없이 거리의 아이들이 달려와 그의 외투와 모자, 양말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렇게 거리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 학대를 당했다는 거죠?

"그렇죠.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얻어맞았죠. 살기 위해 매일같이 구걸했고 도둑질했고요. 아이들과 식당 뒷골목에서 종종 음식을 훔쳐먹고 다녔는데, 그때 하도 '가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을 때도 그 단어만큼은 뇌리에 남아 있더라고요(웃음)."

팔뚝을 불에 덴 지 얼마 되지 않아 클레멘트는 지나가던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충현보육원에 넘겨졌다. 1952년 10월 8일이었다. 이 날은 이후로 그의 출생일이 됐다. 보육원에서도 그는 차별받는 존재였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목욕물도 배식도 제일 나중에 받기 일쑤였다. 다른 아이들이 그의 목욕물에 똥·오줌을 싸놓는가 하면 한겨울에 덮고 있는 이불을 빼앗아 가버리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과 싸우다 걸리면 선생에게 여지없이 얻어맞았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1956년 일곱 살이었을 때, 미국 뉴욕에 있는 리처드와 준 클레멘트 부부에게 입양됐다. 미국 의회가 당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를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면서 그가 '제1차 입양 대상자'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얼떨결에 비행기라는 것을 탔다. 24시간가량 날아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들렸다. 거기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여객기 계단을 내려가자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구나!" 새아버지 리처드 클레멘트였다. 새아버지는 웃으며 그에게 장난감 지프를 내밀었다. 아이는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어나서 장난감을 처음 만져봤기 때문이었다.

처음 들었던 선생님의 칭찬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겠네요.

"그야말로 다른 행성에 도착한 기분이었죠(웃음). 다섯 살 많은 누나와 한 살 어린 남동생,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이 집에 있었는데, 형제들은 문틈으로 나를 바라보며 깔깔거렸어요. 어머니는 나를 소파에 앉혔는데 소파라는 것도 난 그때 처음 봤죠(웃음)! 밥 먹을 때는 또 어떻고요. 의자가 너무 높아 보여서 나 혼자 마루에 앉아서 밥을 먹겠다고 했어요(웃음). 내 접시에 음식이 너무 많아서 조금만 덜고 옆 사람에게 넘겼더니 다들 또 웃었고요. 그 접시에 담긴 음식이 다 내 것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죠. 바나나도 처음 봤는데 어떻게 먹는지 몰라 껍질까지 먹었죠(웃음). 밤마다 침대에서 떨어져 부모님이 내 침대 옆에 소파를 붙여줬죠. 그래도 매일 악몽을 꿨어요. 총소리가 나고 비행기가 새까맣게 하늘을 덮는 꿈요. 당시 어머니가 쓴 일기를 보면 내가 매일 밤 '불이야!' 소리를 지르며 깼다고 적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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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뉴욕 공항에 도착해서 새아버지를 만난 토머스 클레멘트(왼쪽). 태어나서 처음 받는 장난감 자동차가 어색해 인상을 쓰고 있다. 1998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난 클레멘트(가운데). 한국계 아내 김원숙과 그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친구다(오른쪽). / 토머스 클레멘트 제공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클레멘트는 학교에서 적응하는 데도 한동안 애를 먹었다. 초등학교 2학년 수학시험 때였다. 아는 문제가 당연히 하나도 없었다. 옆자리 친구 크리스토퍼의 답안지를 그대로 베껴 냈다. 선생님은 채점 후 "크리스토퍼? A플러스. 잘했다. 다음은… 또 크리스토퍼 A플러스?"라고 했다. 그만 친구 이름까지 베껴 쓴 것이다.

5학년은 두 번 다녔다. 제때 진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학년 어느 날이었다. 한 선생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토미야, 넌 보통 똑똑한 게 아니구나!"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뭘 잘했나요.

"정말 별것 아니었는데 그렇게 칭찬을 하셨어요. 그 선생님은 부모님에게도 '아드님이 정말 똑똑하다'고 얘기해줬어요. 아버님은 '그럴 리가요'하고 웃어넘겼지만요(웃음). 당시 부모님은 제 남동생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어요. 동생이 의대에 가길 바라면서 비싼 사립학교에 보냈죠. 그런데 선생님이 뜬금없이 후진국에서 입양해 온 영어도 못 하던 아이를 칭찬하니 부모님으로선 어리둥절했겠죠."

부모님은 그를 직업고등학교에 보냈다. 클레멘트는 "그곳에서 타이어 갈아 끼우는 법을 배우는 게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서서히 뒷심을 발휘했다. 인디애나대에 진학해 심리학 학사를 땄고, 인디애나대―퍼듀대 인디애나폴리스 캠퍼스(IUPUI)에서 전자공학 학사도 받았다. 학위를 받고 나서는 웨이브텍이라는 기술회사 부품생산부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로봇으로 조립할 수 있는 감쇠기(attenuator·전기신호의 진폭을 작게 하는 장치) 등을 잇따라 발명하며 이름을 알렸다. 3년도 되지 않아 의료기구를 만드는 밴텍이라는 회사로 스카우트됐고 4개 특허를 출원했다. 1988년에는 지금의 회사를 직접 차렸다. 복강경 수술 등에 쓰이는 의료기구를 만드는 회사로, 클레멘트는 이곳에서 48개 특허를 출원했다.

―전쟁고아가 미국에서 특허를 52개나 획득한 과학자가 된 거군요.

"부모님이 그렇게 의사를 시키고 싶어 했던 동생은 결국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공부를 포기했어요. 그 이후로 어떤 곳에도 취직하지 못했죠. 반면에 영어 한마디도 못 하던 나는 박사학위도 땄고 특허도 땄죠. 이젠 제가 대학에서 의사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하고요. 인생이라는 게 알 수 없죠."

1998년 클레멘트는 한국 정부와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입양아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청와대 대통령 만찬에도 참석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입양아들에게 "20만명이나 되는 한국 아이들이 외국으로 팔려 나가야만 했던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입양아 대표였던 클레멘트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꾸고 싶지도 않습니다. 대통령께서 미래로 향한 문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내 몸이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한국

―당시 김포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큰 충격을 받으셨다죠.

"맞아요. 설명하기 좀 힘든데요. 비행기 창문으로 한국 땅이 보이는 순간 패닉이 됐어요. 40년 넘게 잊고 지냈던 전쟁의 기억, 어머니의 기억, 거리 생활과 고아원의 기억… 그런 것들이 갑자기 휘몰아치면서 '쾅' 하고 온몸으로 충격을 느낀 거죠. 그건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인 거예요. 뇌에 간직돼 있는 게 아니라, 내 근육과 몸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인 거죠."

클레멘트는 서울에서 일주일 남짓 머물면서 곳곳에서 오감을 깨우는 기억과 그렇게 마주했다. 떡이 그랬고 김치가 그랬고 팥죽이 그랬다. "처음 보는 음식 같았는데 입에 넣는 순간 세포들이 살아나는 것 같더군요. 내 몸은 떡과 김치와 팥죽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중년 여성들도 종종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간혹 생각했죠. '저 사람이 친어머니일지도 모르겠다'라고요."

―친어머니는 왜 안 찾습니까.

"그새 다른 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고 계실 텐데, 내가 별안간 그 집 문을 두들겨서 '저를 아시느냐'고 묻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 인생을 그렇게 뒤흔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나를 낳아주신 분이니, 할 수 있는 한 저도 보호해 드리고 싶습니다."

클레멘트는 어머니를 찾지 않는 대신, 해외로 자식을 입양 보내놓고 뒤늦게 자식을 찾고 싶어 하는 부모들을 위해 그들의 DNA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반대로 부모님을 찾는 입양아들을 위해 이 데이터베이스에 부모 DNA가 있는지 찾아주는 검사 키트를 개인 돈 100만달러를 들여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문을 두들기는 경우가 아니라, 서로 애타게 찾고 있는 경우라면 내가 연결고리가 돼주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인 1999년엔 북한을 봉사단원의 일원으로 방문했다. 3년 넘게 계속된 홍수로 북한 주민들이 기근을 겪고 있는 데다 건강 상태도 최악이라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7만3000달러 상당의 의료 장비를 기증하는 한편, 북한에서 직접 복강경 수술의들을 훈련시키고 평양의대 의료센터에서 강의를 했다. 그때 그는 어떤 식당 앞에서 다섯 살짜리 꼬마 남자애가 맨발로 구걸하는 장면을 봤다.

―그 아이가 눈에 밟힌 이유가 있을까요.

"'저 아이가 내 모습이구나' 싶었어요. 옛날 거리를 떠돌던 내 모습요. 이불도 밥알 하나도 내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나 말이죠. 그때 생각했죠. '내가 참 먼 길을 돌아 지금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요."

클레멘트는 한국 출신으로 미국 시민권자인 김원숙과 결혼하면서 다시 한국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떻게 배웠습니까.

"한글도 비뚤비뚤 써보고 아내와 윷놀이도 하고, 명절이면 한국에서 처가 식구들과 어울려 밥도 먹고 그러죠. 이상하죠? 예전의 나는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한국말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나는 다시 한국말을 배우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웃음). 어쩌면 내게 한국이란 영원한 숙제 같은 것인가 봐요."

아버지, 그리고 장난감 자동차

클레멘트는 앞으로도 아내와 함께 입양아를 위한 후원 활동과 미국 대학 장학 기금 설립 등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더 나누고 사람들을 도우며 살다 가고 싶다"고 했다.

―누구보다 힘들게 성공했는데, 그걸 남과 나누려면 아깝지는 않습니까.

클레멘트는 "내 첫 생일파티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미국으로 입양되고 나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줬어요. 동네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았고 아이들은 내게 선물을 줬죠. 생일선물을 그때 처음 받아봤어요. 어리둥절했죠. 금방 빼앗길 것 같았어요. 어쩔 줄 몰랐죠." 클레멘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결국 나는 방구석에 쌓인 선물을 파티 내내 지키고 서 있었어요. 누가 가져가면 어쩌나 걱정하면서요. 그렇게 내 파티는 끝이 났어요.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내가 그 선물을 지키느라 파티를 놓쳐버렸다는 것을요(웃음). 이후에 저는 결심했어요. 인생에서 다시는 바보처럼 파티를 놓치며 살지 않겠다고요."

―남과 돕고 사는 게 파티라는 건가요?

"맞아요. 인생이라는 파티에서 케이크 위 촛불처럼 반짝이는 순간이죠. 내 돈과 재산이 없어질까 걱정하면서 그 파티를 즐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겁니다."

양아버지 리처드 클레멘트는 작년 9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 클레멘트는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까 고민하다가 미국에 입양돼 도착한 날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장난감 자동차를 찾아서 들고 갔다. 늙고 쇠약해진 아버지는 그것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아들과 장난감을 차례로 가리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고, 이건 내가 가장 잘 산 물건이었다(The best choice, the best purchase in my entire life)."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을 바꾸고 싶습니까.

"아뇨. 하나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클레멘트는 눈을 감았다. "저는 이제 이렇게 믿어요. 어머니는 그때 나를 길에 버린 게 아니었다고. 더 넓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가는 길로 보내줬다고 말이지요." 그 골목에서 소년은 그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껏 걸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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